중공군 개입과 1·4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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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 중공군 개입과 1·4 후퇴 |
|---|---|
| 시기 | 1950년 10월(중공군 참전) ~ 1951년 1월 4일(서울 재함락) |
| 장소 | 압록강 인근, 개마고원(장진호), 서울 |
배경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하자 중국은 자국 국경이 직접적인 위협을 받는다고 판단해, 1950년 10월 마오쩌둥의 결정에 따라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병력을 비밀리에 한반도로 투입했다.
전개
중공군은 11월 말 청천강과 장진호 일대에서 유엔군을 기습적으로 대규모 공격했다. 특히 미 해병 1사단이 혹한의 개마고원 장진호 일대에서 포위된 채 치른 장진호 전투는 극한의 추위 속에서 치러진 처절한 철수 작전으로 유명하다.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전선은 순식간에 붕괴됐고, 유엔군과 국군은 북한 전역에서 총퇴각에 들어갔다. 12월에는 흥남 지역에 고립된 대규모 피란민과 국군·유엔군을 배로 구출하는 흥남철수작전이 이루어져 약 10만 명의 민간인이 남쪽으로 피란했다. 후퇴는 계속돼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이 다시 북한군과 중공군 수중에 함락됐다(1·4 후퇴).
의의
중공군의 개입은 6·25전쟁을 남북 간 내전에서 미국과 중국이 사실상 직접 충돌하는 국제전으로 확대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이로써 전쟁은 어느 한쪽의 완전한 승리로 끝나기 어려운 장기전 양상으로 접어들게 됐고, 이후 38선 부근에서 전선이 고착되는 결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