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발발 - 1950년 6월 25일 남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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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 6·25전쟁의 발발 |
|---|---|
| 시기 | 1950년 6월 25일 |
| 장소 | 38선 전역(옹진반도~동해안) |
배경
1948년 남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38선 일대에서는 소규모 무력 충돌이 계속됐다. 북한은 소련의 군사 지원을 받아 전차(T-34)와 전투기 등을 대규모로 확보하며 군사력에서 국군을 크게 앞서고 있었고,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승인을 받아 무력 통일 계획을 추진했다.
전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은 소련제 전차를 앞세워 38선 전역에서 기습적인 전면 남침을 개시했다. 국군은 전력 열세와 기습으로 각 전선에서 급속히 밀려났고, 개전 사흘 만인 6월 28일 수도 서울이 함락됐다. 이승만 정부는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며 서울 이남으로 후퇴했는데, 이 과정에서 미처 피란하지 못한 다수의 시민과 병력이 한강 이북에 고립되는 피해가 발생했다(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5일 당일 북한의 남침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이어 유엔군 파병을 결의하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참전이 신속히 이루어졌다.
의의
개전 초기의 급속한 붕괴는 대한민국이 건국 2년 만에 존립 자체를 위협받는 위기로 이어졌다. 그러나 유엔 안보리의 신속한 대응(당시 소련이 중국 대표권 문제로 안보리를 보이콧하고 있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한 점이 크게 작용했다)으로 국제사회가 신속히 개입하면서, 이후 국군은 유엔군과 함께 낙동강 방어선에서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