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 탕평책과 균역법, 최장수 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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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어진(1900년 이모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보물 제932호)
영조 어진 — 1744년 원본을 1900년에 다시 그린 이모본.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Wikimedia Commons(KOGL Type 1)
묘호영조(英祖)
이름이금(李昑)
재위 기간1724년~1776년(52년, 조선 최장수 재위)
이전 왕경종
다음 왕정조

배경

영조는 숙종의 넷째 아들로, 어머니 숙빈 최씨는 궁녀 출신의 낮은 신분이었다. 이복형 경종이 후사 없이 병약하자 노론의 지지를 업고 1721년 세제로 책봉됐고, 신임옥사로 자신을 지지한 노론이 대거 숙청당하는 위기를 겪으면서도 경종의 보호로 지위를 지켰다. 1724년 경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전개

즉위 초 경종 독살설 등 정통성 시비에 시달렸던 영조는 노론·소론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재위 내내 강력하게 추진했다.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워 이를 상징화했으며, 서원의 남설을 억제하고 산림(재야 유학자)의 정치 개입을 제한해 왕권 중심의 정치 질서를 세우려 했다. 민생 정책으로는 백성의 군역 부담을 절반으로 줄인 균역법(1750년)을 시행했고, 가혹한 형벌(압슬형 등)을 폐지하는 등 인정(仁政)을 표방했다. 그러나 1762년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임오화변은 그의 치세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세자의 정치적 행보와 부자간 갈등, 노론 벽파의 개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사도세자의 아들(훗날 정조)을 세손으로 삼아 후계를 이었다.

의의

영조는 52년이라는 조선 역사상 최장 재위 기간 동안 탕평책으로 붕당 대립을 완화하고 균역법 등 민생 개혁을 이뤄 '조선 후기 중흥'의 토대를 놓은 왕으로 평가된다. 손자 정조와 함께 '영정조 시대'로 불리며 조선 후기 문예 부흥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다만 임오화변으로 아들을 죽게 한 것은 그의 치세 전체를 관통하는 비극이자, 정조 즉위 이후 정치 지형에도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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