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 두 차례 사화와 폭정, 중종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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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호 | 연산군(燕山君) — 폐위된 왕으로 묘호 없이 '군'으로 강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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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이융(李㦕) |
| 재위 기간 | 1494년~1506년(12년) |
| 이전 왕 | 성종 |
| 다음 왕 | 중종 |
배경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폐비 윤씨다. 윤씨는 연산군이 세 살 때 투기와 왕에 대한 불경 등을 이유로 폐출됐다가 1479년 사사됐는데, 연산군은 이 사실을 성종 생전에는 알지 못한 채 성장했다. 1494년 성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전개
즉위 초에는 비교적 무난하게 통치했으나, 1498년 김일손의 사초(조의제문)를 문제 삼아 훈구파와 결탁해 사림파를 대거 숙청한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1504년에는 친모 폐비 윤씨 사사의 전말을 알게 되면서 갑자사화를 일으켜 사건에 연루된 훈구·사림 인사들을 대거 처형했고, 이 과정에서 죽은 한명회 등의 부관참시까지 벌어졌다. 이후 언론 기관인 사간원·홍문관을 폐지하고 경연을 중단시키는 등 언로를 완전히 막았으며, 막대한 재정을 소모하며 사냥과 연회에 탐닉해 흥청망청이라는 말의 어원이 된 '흥청'을 두기도 했다. 결국 1506년 성희안·박원종 등이 주도한 중종반정으로 폐위돼 강화도로 유배됐고, 그해 그곳에서 사망했다.
의의
연산군은 조선 왕조에서 광해군과 함께 '군'으로 강봉돼 묘호를 받지 못한 단 두 명의 왕 중 한 명으로, 폭정과 사화로 대표되는 조선의 대표적 폭군으로 기록된다. 두 차례의 사화로 신진 사림 세력이 큰 타격을 입었으나, 그의 폐위(중종반정) 이후 오히려 사림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회복되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조선 중기 정치사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