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 반원 개혁과 쌍성총관부 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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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공민왕(恭愍王) — 몰락 직전 다시 '왕'이 아닌 묘호에 준하는 칭호 사용
이름왕전(王顓)
재위 기간1351년~1374년(23년)
이전 왕충정왕
다음 왕우왕

배경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 원에서 오랜 숙위 생활을 하며 성장했다. 1351년 원이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그를 새 왕으로 세웠다. 즉위 무렵 원은 홍건적의 봉기 등으로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고 있었다.

전개

공민왕은 원의 국력 쇠퇴를 기회로 삼아 강력한 반원 자주 개혁을 추진했다. 1356년 원의 내정 간섭 기구였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원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기철 등 부원 세력을 숙청했으며, 원 간섭기 동안 원에 빼앗겼던 쌍성총관부(철령 이북)를 무력으로 수복해 영토를 회복했다. 신돈을 등용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개혁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는 등 국력 소모가 컸고, 왜구의 침입도 빈번했다. 1365년 사랑하던 왕비 노국대장공주가 난산으로 세상을 떠나자 극심한 상실감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했고, 신돈이 실각한 뒤에는 개혁의 동력을 잃었다. 결국 1374년 측근 환관들에게 시해됐다.

의의

공민왕은 원 간섭기를 종식시키고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려 한 개혁 군주로 높이 평가되며, 쌍성총관부 수복은 고려 영토사에서 중요한 성과로 꼽힌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 사후의 정치적 표류와 신돈 개혁의 좌절, 그리고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후 우왕 대의 혼란과 고려 멸망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됐다. 그가 등용한 신진사대부 세력은 이후 조선 건국의 주역으로 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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